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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번째 강아지 럭키

  • 작성자 사진: f4strada
    f4strada
  • 6월 2일
  • 4분 분량
첫 강아지가 될 뻔한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명개
첫 강아지가 될 뻔한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명개

국민학교 (초등학교의 옛 명칭) 5학년 때 쯤입니다. 대부분 어린이들이 그러하듯 저도 부모님께 강아지 사달라고 졸랐습니다. 그 당시 저희 부모님은 반려동물을 집에서 키우는 것에 결사반대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모네서 키우던 말티즈(?) 같은 하얗고 작은 개를 우리집에 준다고 하셔서 마지못해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그 강아지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국딩 하상범은 작고 하얀 이 생명체가 너무 신기하여 이불에 누워 보고 또 보고 만져 보고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스토리가 늘 그러하듯 강아지의 배변 실수를 경험하신 부모님은 다음 날 강아지를 다시 이모네로 돌려줘야겠다 하셨습니다. 이 역시 클리세지만 저는 울고 또 울며 저항했습니다. 저의 저항운동이 무색하게도 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명의 흰둥이는 그렇게 단 하루만에 반품 처리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강아지하면 그 때 일이 먼저 생각납니다.

그 당시 나는 얼마나 울었던가? 얼마나 부모님을 원망했던가?


시간이 흘러 저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누렇고 다리가 짧은 웰시코기라는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허말랑을 사랑했을 뿐인데 사랑을 받기 위해선 강아지도 같이 사랑해야만 했습니다.


도른자. 도른개 럭키
도른자. 도른개 럭키

제가 럭키를 처음 본 건 럭키가 7살 때였습니다. 럭키는 아내만큼이나 얼굴이 이쁜 강아지였습니다만 어딘가 살짝 맛이 이상한 개였습니다. 일단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비염이 있는지 숨소리는 엄청 거칠고 계속 돌아다니고 조금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미친듯이 짖어대는데 광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어준 별칭은,

안돼를 모르는 강아지

저와 럭키는 그다지 사랑을 주고 받는 사이는 아닙니다. 사실 잘 안맞아요. 저는 개에게 복종을 원하는데 럭키는 복종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개입니다. 그냥 형이 무서운 리더라서 럭키가 맞춰주는 척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7년을 보냈습니다. 30대의 저는 40대가 되었고 7살 럭키는 15살이 되었습니다. 40대의 하상범이 변한 것 이상으로 15살 럭키는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엔 온리 반항만 하던 녀석이 제 옆에 착 붙어있고 순순히 복종할 때 왠지 마음 한 켠이 축축해졌습니다.


작년 11월 럭키는 많이 아팠습니다. 제 인스타를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신부전 진단을 받았지요. 그리고 이전 글에도 써놨지만 여러 우여곡절 끝에 럭키는 운좋게도 완벽하게 다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이것이 올해 2월까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5월까지 3개월동안 럭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았습니다. 신장 수치를 제외한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반항하고 모든 일에 간섭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귀가 터질 정도로 짖어댔습니다. 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침대에도 한방에 뛰어오르는 럭키를 보고는 마치 럭키가 7살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마음이 너무 평화로웠습니다.

이러다가 20살까지 사는거 아냐?
20살까지 매일 피하수액 놔야해?
안되는데...적당히 살어. 럭키! 알았지?

얼마 전 부모님이 집에 방문하셨는데 럭키 보시더니

몇 년은 거뜬하겠다

그렇게 럭키는 행복한 3개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5월 22일 갑자기 럭키가 설사를 하면서부터 행복한 시간은 막을 내렸습니다. 병원에서 초음파를 해보니 럭키는 혈관육종 진단을 받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한 달 정도로 이야기를 들었고 호스피스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허말랑과 2교대로 24시간 럭키 케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밤, 럭키는 심한 발작을 했습니다.


너도 우리도 견디기 힘든 시간

럭키는 이후로도 한 번 더 발작을 했습니다. 비틀거리고 계속 아무 이유없이 집안을 맴돌았습니다. 불러도 반응도 없고 우리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습니다. 걸으면 걸을 수록 점점 더 뒷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푹. 푹. 주저앉기 시작했습니다. 밤에는 호흡이 힘들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밤을 거의 새면서 럭키가 이렇게 죽는건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것 먹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전 진단으로 인해 맛없는 처방식만 먹다가 이렇게 가는 것은 좀 너무하다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먹다 남은 바나나우유를 조금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럭키가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닭가슴살을 삶아서 급여했더니 하루 이틀 사흘 나흘...시간이 갈 수록 럭키가 점점 살아났습니다. 걸음도 비교적 정확해지고 눈도 초롱해지고 체온도 정상,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죽었구나 체념했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가 뭔가를 했더니 럭키의 상태가 좋아지니까 머리속이 엄청나게 복잡해졌습니다. 병원에서 혈관육종이라고 했는데 혹시 혈관육종이 아니면 어떻게 하나? 또는 혈관육종은 맞는데 지금 럭키가 아픈건 혈관육종탓이 아닐 수도 있잖아?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번 병원 진찰 때 선생님의 설명이 논리 정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욱 더 머리 속이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7일이 지난 오늘 아침 저는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쟁점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PPT로 정리했습니다.



럭키는 여전히 활력이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의사선생님과의 대화로 럭키 말년의 돌파구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 30분에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습니다. 선생님께 준비해간 내용을 자세히 설명드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럭키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셨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와서 다시 진료실에 들어가 선생님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마 오늘 수의사 선생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재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되었습니다.


현재 럭키는 다음과 같은 상황입니다.

  • 지금 아픈 건 신부전 증상 - 크레아틴 수치의 상승 그리고 약한 빈혈 증상

  • 지난 주 아팠던 건 혈관육종의 미세출혈 탓일 수도 있음

  • 지금 괜찮아진 건 미세출혈이 멎었기 때문일 수도 있음

  • 지금 비장에 있는 혈관육종의 크기는 5.9센티미터 (지난 주 보다 0.9센티미터 커짐)


이제 모든 퍼즐이 맞춰졌습니다. 그리고 결과도 정해졌습니다. 혈관육종의 성장 속도를 보니 아마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4월까지는 팔팔했던 것이 맞았고 5월부터 암세포에 먹혀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개들이 대사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빨라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현재 럭키의 비장은 이미 종괴에 잠식 상태이고 오늘 밤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비장이 10cm 정도 되는데 그 중에 5.9cm면 너무 큰 상태입니다. 종양의 크기를 말할 때 길이의 단위인 cm 로 이야기하지만 실제 종괴의 크기는 부피의 단위인 cm^3이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엄청나게 크게 부풀어 올라있을 것입니다. 즉, 이 혈관 풍선이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아마도 럭키는 한 번에 크게 터질 것 같습니다. 즉, 갑자기 럭키는 짧은 시간 안에 숨을 거둘 확률이 높습니다.


사랑해
사랑해

착잡한 마음으로 럭키를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나의 첫 강아지는 흰둥이일까? 럭키일까?

당연히 질문의 답은 럭키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왜 나는 "첫 번째 강아지"가 럭키라고 생각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잠시 생각해보니 제 답은 "책임"이었습니다. 국민학생 하상범은 흰둥이를 책임진 적이 없었고 지금의 하상범은 럭키를 책임졌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감히 "나의"라는 소유격을 생명체에 붙이기 위해선 그에 맞는 "책임"이 필요하다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저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저는 럭키를 위해 많은 것을 했습니다. 그 놈이 살 집을 지었고 그 무거운 놈을 맨날 들고 다녔고 그 놈 똥꼬도 맨날 닦아주고 아플 땐 병원비도 벌어다 줬고 밤에 잠도 안자고 간병도 했습니다. 저는 온 마음을 다해 럭키를 책임지고 키웠고 이제 수명이 다한 그 놈을 잘 보내주는 마지막 책임까지 다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네요.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저는 저의 첫 강아지와 이별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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